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츠 리스트 (문단 편집) ==== 가르침이나 도움을 받은 경우 ==== * [[카를 체르니]] 리스트의 첫번째이자 유일한 피아노 스승. 9살부터 체르니 밑에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체르니는 리스트와의 첫만남에 대해 "창백하고 건강도 좋지 않아보이는 소년", "(피아노를 연주할 때)술에 취한 사람처럼 움직였고 연주는 체계가 없이 손가락을 건반 위에서 되는 대로 움직였다"고 서술하면서도 "그럼에도 재능은 놀라웠으며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초견연주를 시키고 보니 하늘이 내린 피아니스트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고 회상했다. 원래는 상당히 비싼 수업료를 받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방침이었던 체르니였으나 어린 리스트의 연주를 듣고 재능을 인정하여 특별히 한시간에 1굴덴만 받고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으며, 리스트 가족의 경제사정이 갈수록 어려워지자 아예 레슨비를 받지 않고 리스트를 가르쳤다고 한다. 체르니 본인의 회고록에 의하면 처음 몇 달은 철저하게 기교 연습에만 매진하도록 했으며 리듬을 엄격하게 통제시킨 채 고른 소리, 노래하는 듯한 소리를 강조했고, 곡들을 아주 빠르게 초견하도록 훈련시키거나 주제를 제시하여 즉흥 연주도 익힐 수 있게 훈련했다고 한다. 이런 가르침으로 리스트는 피아니스트들 중에서 역대 최고를 논할 수준의 테크닉을 갖추게 되었으나, 너무 화려한 연주스타일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체르니는 성장한 제자의 음악을 그닥 반기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런 체르니한테 리스트는 [[초절기교 연습곡]]을 헌정했다. * [[안토니오 살리에리]] 빈에서 체르니에게 피아노를 배우던 시기에 살리에리 밑에서 가창, 관현악 총보를 읽는 방법, 화성, 대위, 관현악 편곡 지식 등을 배웠다. 체르니와 마찬가지로 살리에리 또한 수업료를 받지 않고 리스트를 가르쳤다. 당시에 리스트 일가족은 경제형편이 어려워 빈 외곽의 여관에 머무르면서 체르니와 살리에리의 수업을 받으러 빈 시내까지 오갔어야 했는데, 살리에리는 이런 환경 때문에 리스트의 건강이 나빠지는 것을 걱정했다고 한다. 그는 리스트 부자 몰래 아담 리스트가 근무했던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리스트의 재능을 칭찬하며 그의 가족이 빈 시내로 이사할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는 편지를 써서 리스트 가족의 이사를 도왔다. 살리에리에게 배웠던 시절로부터 60년이 지난 후에도 리스트는 살리에리에 대해 "지금까지도 마음 깊숙히 감사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 안톤 라이하, 페르디난도 파에르 파리음악원 입학이 외국인이란 이유로 무산되자 12세의 리스트는 개인교습으로 파에르에게 작곡을, 라이하에게 음악이론을 배웠다. 파에르는 파리의 테아트르 이탈리엥 음악감독으로서 리스트의 오페라 <동상슈> 위촉을 추진했으며, 라이하는 파리음악원의 대위법 교수였다. 위처럼 리스트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 명망 높은 음악가들의 자비와 친절로 음악을 배울 수 있었는데, 이런 경험의 영향인지 리스트도 경제적으로 안정된 후에는 수업료를 한 푼도 받지 않고 많은 제자들을 키우게 됐다. * [[조아키노 안토니오 로시니]] 리스트는 밀라노에 방문할 때마다 이미 오페라계에서 은퇴해 있던 로시니의 살롱을 방문하며 로시니와 교류했다. 1830년대 당시만 해도 이탈리아에서는 오페라는 인기 있어도 피아니스트나 유명한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로시니와 그 동네 악보 출판 관계자의 인맥 덕분인지 리스트는 스칼라 극장에서 연주회를 열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